병풍 그림 여덟 첩에 우연히 쓰다〔屛畫八帖偶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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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 그림 여덟 첩에 우연히 쓰다〔屛畫八帖偶題〕
옥 이슬 옛 먹과 가볍게 어우러져 향기로우니 / 玉露輕和古墨香
두보가 시에서 꺼렸던들 또 무슨 상관이랴 / 杜陵詩諱亦何妨
술 마신 티가 반쯤 나는 양귀비가 자는 듯하니 / 酒痕半著楊妃睡
인간세상의 부귀 치장과는 아주 다르네 / 殊異人間富貴粧
위는 해당화이다.
빈 골짝에서 그윽한 자태로 옥 이슬이 방울져 / 空谷幽姿玉露漙
맑은 향기 맡으려니 가지 당기지 못해 슬프네 / 淸香欲嗅悵難攀
누런 구름 드리운 저물녘에 산바람이 이니 / 黃雲薄暮山風起
향기 불어 인간 세상에 떨어뜨릴까 두렵네 / 猶怕吹香落世間
위는 난초이다.
창을 두른 푸른 구름 빽빽하여 열리지 않나니 / 繞槊蒼雲密不開
누가 버릇처럼 바위 모퉁이에 심어놓은 것일까 / 何人成癖卜巖隈
해 저무는 때 알아주는 이 없다 불평하지 말게 / 休嫌歲晩無知己
순 임금의 피리 되기도 전에 봉황 이미 왔으니 / 未作虞簫鳳已來
위는 대나무이다.
어쩌면 풍격이 포선의 기골과 같을까 / 何卽風格逋仙骨
대숲 너머 가지에 성긴 그림자 의연하네 / 疏影依然竹外枝
도리는 봄을 믿고 배꽃은 비를 머금었는데 / 桃李倚春梨帶雨
추위 견딘 외로운 꽃 마음으로 감상할 이 누굴까 / 耐寒孤豔賞心誰
위는 매화이다.
지는 햇살에 기러기 비껴나는 만 리 먼 가을 / 橫篆斜陽萬里秋
몇 마디 울음소리가 저물녘 강 머리를 차지했네 / 數聲占斷暮江頭
인간 세상에도 한가한 전지가 있어 / 人間亦有閒田地
가을 물과 갈대꽃이 한 구역 별천지를 열었네 / 秋水蘆花別一區
위는 갈대밭의 기러기이다.
안개 숲에 서리 떨어지고 가을 물 많은데 / 霜落煙林秋水多
강 가득한 비바람이 갈대숲에 어지럽구나 / 一江風雨亂蒹葭
고기잡이 노인도 아직 기심 잊지 못해 / 漁翁亦未忘機者
종일 낚싯대 드리우고 도롱이 벗지 못하네 / 盡日垂竿不脫簑
위는 고기잡는 노인이다.
안개 가르는 외로운 연기 저녁 숲에 일고 / 斷靄孤煙起晩林
푸른 산과 푸른 물은 절로 높고 깊구나 / 蒼山綠水自高深
그림이라고 진짜 색 아니라 말하지 말게 / 休言圖畫非眞色
단청만 보인다면 흥 견딜 수 없을 테니 / 只見丹靑興不禁
위는 산수(山水)이다.
구름 밖에 높이 날아 풍진 세상을 떠났건만 / 昂昂雲外離風塵
그물로 잘못 떨어져 도리어 사람을 의지하네 / 誤落虞羅反附人
해 저물자 요망한 여우들 다투어 물을 건너고 / 日暮妖狐爭渡水
노란 발톱으로 바꾸어도 정신 깃들지 않은 게 한스럽네 / 幻形金爪恨無神
위는 매〔鷹〕이다.
[주-D001] 두보가 …… 꺼렸던들 : 원문의 ‘두릉(杜陵)’은 두보(杜甫)의 호이다. 그는 1500여 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지만 해당(海棠)을 읊은 시는 단 한 구도 없다.
[주-D002] 창을 …… 구름 : 창은 대나무 대궁을, 푸른 구름은 대나무 잎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주-D003] 순(舜) …… 왔으니 : 원문의 ‘우소(虞簫)’는 순 임금의 음악인 소소(韶簫)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소의 본래적 의미를 살려 피리로 번역하였다. 《서경》 〈익직(益稷)〉에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韶簫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대나무 옆에 봉황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D004] 포선(逋仙) : 송(宋)의 은일(隱逸) 임포(林逋)를 가리킨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였으며, 뒤에는 항주(杭州)에 돌아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사니, 사람들은 고산처사(孤山處士)라 호했는데, 이곳에는 특히 매화가 많았으며 산수가 아름다웠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주-D005] 기심(機心) :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불순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 즉 이익을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바닷가에서 아무런 기심(機心)도 없이 갈매기와 벗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부친의 부탁을 받고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자 갈매기들이 벌써 알아채고 그 사람 가까이 날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子 黃帝》
[주-D006] 노란 …… 한스럽네 :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이 그림에는 여러 마리의 매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을 건너는 여우를 노리는 매의 발톱이 두드러지고는 있지만 매의 눈매에서 야성(野性)의 정신이 느껴지지 않음을 아쉬워한 것이다. 원문의 ‘금과(金瓜)’는 금조(金爪)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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