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황준량 탄신500주년 추모비 건립 특강...퇴계종손 이성원 인사 맺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회 작성일 26-08-02 03:46본문
금계의 글과 시(次韻)는 이러하다.
“자리바위에서 퇴계와 임상(임내신)의 시를 따라 지었는데, 바위 위에 유상곡수가 있었다. 원문: 簟巖次退溪任相韻 巖有流觴曲水"
題品亭臺盡命名 정자, 누대 품평하고 이름 붙였으니,
一區形勝幻壺瀛 한 구역 명승지, 바로 신선세계일세.
蘭舟劈浪魚驚躍 목란배 물결 가르니 물고기 놀라 뛰고,
雪客翹沙眼轉明 백로 모래에 내려앉자 눈 더욱 밝아오네.
觴泛會稽飛醉興 술잔 띄우니 곡수曲水인양 감흥 일어나고,
雨催工部動詩情 비 재촉하니 두보杜甫처럼 시심 움직이네.
眞仙高會應傳說 신선들의 높은 모임 전설이 되리니!
留取金聲滿耳淸 머물러 듣는 금옥소리 귓전 가득 맑아오네.
『금계집』, 簟巖次退溪任相
이 그림에서 명작 ‘농암 어부가’가 탄생했다. 세 분의 합작이다. 금계가 이때 어부가 원본을 결정적으로 구해 왔고, 퇴계 역시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완성 후, 농암이 서문을 쓰고, 퇴계가 발문을 썼는데, 그 글에 “아! 선생은 바라보면 신선 같아 진실로 강호江湖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했다. 이리하여 농암은 관료적 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미江湖之美’와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새로운 문학지평을 열어, ‘강호문학의 창도자’가 되었다. 이 모임이 영남가단의 모태가 되어, 면앙정 송순宋純, 송강 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퇴계는 ‘어부가’, ‘도산 12곡’ 을 써서 남겼고, 후인들은 이를 합해 ‘도산가사陶山歌詞’라 했다.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영李彙寧은 “탁영담으로 나와 분강을 오르내리며 ‘어부가 3장’을 다 함께 노래했다”고 했다.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발문은 이렇다.
“전해오는 어부사는 누구의 작품인지 몰랐지만, 어부사를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飄飄하여 유세독립遺世獨立의 정서가 일어났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
분강은 농암 고향이다. 산천은 아름다워, 모재 김안국은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황홀하기가 마치 도원에 들어가 신선을 만난 듯하다(山水淸麗 恍然 若入桃源而値仙老)”고 했으며, 농암도 어부가에서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 (三公不換此江山)”고 했다. 농암은 영정影幀(보물 872호)모습을 보면 그 풍도가 신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시적 이미지는 신선세계의 신선모임이다. 퇴계가 농암에게 “빗속에 신선을 보낸다.” 고 하고, 농암도 고무되어, “스스로 신선이 되었다.”고 했다. 퇴계도 ‘선경에 오른 듯하다’고 하니. 소망한 신선에 한 발 다가선 모습이다. 금계는 두 분 모두 신선이라 했다. 농암, 점석 일대는 ‘신선 세계’이며, ‘신선들의 높은 모임’은 그대로 ‘전설이 될 것’이라 했다.
농암은 모두가 신선이라 했고, 퇴계는 이미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금계 표현도 지나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자신을 신선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퇴계가 “세속을 벗어난, 그림 같은 인물”이라 했으니,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금계錦溪’와 ‘금선대錦仙臺’의 명명도 예사롭지 않다. ‘그림 같은 얼굴’과 ‘비단 같은 개울’ 은 정말 어울리지 않은가. 신선대는 있지만, 비단 같은 신선이 깃든 대- ‘금선대’의 명칭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유금선대遊錦仙臺’ 라는 시는 바로 신선유람神仙遊覽이다.
小白雲霞誰第一 소백산 경치 어디가 제일인가
仙臺風月自無雙 금선대 바람과 달, 짝할 데가 있으랴
爲披春服尋芳去 봄 옷 지어 걸치고 꽃 찾아 떠나
倦倚松陰倒玉釭 소나무 그늘에 기대어 술잔을 기울이네
단양 구담에서 ‘구선龜仙’이라 불린 이지번李之蕃과 의기투합했고, 그 아들 이산해는 8살에 쓴 글을 보고 격찬하며(屛見李山海八歲所書), 이후 친구처럼 시문을 주고받았다. 풍류 문필의 달인, 신재 주세붕과도 친밀했다. 신재가 22세 많고, 아계가 22세 연하였으니, 금계의 교유폭도 44세를 넘나들고 있다.
퇴계가 그러했듯이, 금계도 그러하다. 농암도 그러했다. 농암은 8개 고을, 25여년 고을 원을 자청해서 근무했고, 차관 은퇴한 분이다. 물욕을 물론 명예욕도 없는, 모두가 자기 과시 없는, 진정 신선 같은 고귀한 생애를 함께 걸어 간 분 들이다.
여기서 잠시, 금계가 신재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이 “꿈에 주 경유를 만나 감회가 일어(夢周景遊有感)”이다. 여기서 신재를 신선이라 했다.
死別呑聲動五年 사별하여 목이 멘 지 5년이 흘렀건만
夢中風彩尙依然 꿈속에도 풍채는 오히려 의연하여라
山陽已愴隣吹笛 산양에서 이웃 피리소리에 이미 슬퍼졌는데
遼海還驚鶴幻仙 요해에서 학으로 환생한 신선에 다시 놀랐네
墓左靑蒭違漬酒 묘소 왼쪽 푸른 풀이 적시는 술을 저버려
琴中白雪斷哀絃 거문고 속, ‘백설가’는 애절한 현을 끊었네
分明表我長相憶 분명 내게 길이 생각하자는 뜻 표하셨음에
不信詩魂隔九泉 시혼이 구천을 격해 있다는 것 믿지 못하겠네
신재는 농암과도 친밀했다. 점석, 청량산, 용수사로 이어지는 풍류 흥취는 신선을 방불 하게 한다. 명작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을 짓고, 발문을 농암, 퇴계에게 동시에 요청한 분이 신재이다. 신재, 퇴계, 금계가 농암 시를 함께 차운하기도 했다. 퇴계의 농암, 금계 행장은 이런 만남에서 이미 쓰여 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시를 보면, 금계는 자부하고 있다. 자신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시는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보杜甫를 언급하며, 글에 밀리지 않으니 양보할 생각도 별로 없다. 신선을 모르는 자, 신선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세 분 모두, 자신들은 신선의 경지에 올랐고, ‘분강점석의 유상(汾江簟石之遊)’은 전설의 ‘유상곡수의 모임(流觴曲水之會)’을 구현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부가가 지어지고 불리어진 이 점석의 유상은 정영 신선들의 향연이었다. 이 날 농암은 81세, 퇴계 47세, 금계 31세였다.
퇴계가 농암행장을 저술할 때, 금계와 의논했고, 많은 초고를 제공받았다. 어느 부분 합작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농암이 몰 하자, 금계는 ‘농암선생묘지명聾巖先生墓誌銘’을 썼는데, 그 글이 행장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별본 행장이라 할 만큼 역작이다.
금계는 농암과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농암 상소문’ 세 편을 대신해서 썼다. ‘단양진폐소’ 처럼 명문이다. 생일에 지어 올린 장편 “龍山高效歐陽永叔廬山高壽聾巖李相公生辰”의 시는 최고의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금계가 농암이 은거하던 용수산龍壽山(현 용두산)을 구양수가 절찬한 중국의 명산 여산廬山을 찬양하여 지은 천하 명시, '여산고廬山高'를 따라 지어 농암의 생일 선물로 올렸다. 농암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전편 시어에 절절이 담겨있다. 1551년 7월 29일, 생일 축수 잔치에 참석하여 썼다. 금계 나이 34세였다.
농암 글을 모아 필사해서 묶었는데, 그 책이『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보물1202호)이다. 뿐만 아니다. 금계는 장인, 처삼촌 등 여러 분과도 많은 시문들을 주고받았다. 지금『금계집』을 살펴보면, 금계는 그 누구와도 시문을 주고받은 명랑하며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농암종택에서 당시 창균 김기보와 더불어 ‘두 서방’이라 했다는 전언은 사실일 것 같다. 창균은 처가살이를 했고, 금계도 상당 기간 처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금계와 퇴계의 뜨거운 관계처럼, 34세 차이의 퇴계와 농암도 그러했고, 50세 차이의 금계와 농암도 다르지 않았다. 세 분은 더불어 지기知己가 되었고, 지음知音이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추모하고, 추억했다. 그것도 영원에 이르도록 했다. 금계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농암과는 38세, 퇴계와는 48세 이전의 일이었다. ’망년지우忘年之友‘를 넘어서는, 저 피안의 만남을 현실로 이루었다. 그래서 금계의 예언처럼 전설이 되었다. 지금 누구도 이런 만남을 이룰 수 없다. 퇴계의 금계행장 저술은 사건이 아니었으며, 금계가 농암을 모신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음도 우연이 아니었다.
금계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일생을 경쟁한 벗이며, 몰후에도 함께 거론되는 소고 박승임은 이런 평을 한 바 있다.
留名滿世 금계의 이름이 세상에 가득하게 남았음은,
遺愛人民 오직 - 백성에게 사랑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름을 세상에 남겼는데, 온통 사랑으로 남겼다”고 했다. 참으로 온당한 평가이고,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더 이상 수사修辭하기 어렵다. 죽마고우의 이 한마디 말로써, 금계의 인생은 완성되었다. 금계는 이제 ‘선생’이 되시었다.
금계 행장은 퇴계께서 쓰셨다. 다시 쓴다고 함은 매우 외람되다. 쓴다고 쓰는 나의 이런 글은 화사첨족畵蛇添足에 불과하다. 그러나 500년이 흐른 지금, 금계는 다시 평가되어야 된다. 퇴계의 표현처럼, 금계는 ‘금계선생’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대접 받음이 마땅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후인들의 도리이다.
이 글은 금계에 대한 그런 대접과 도리 차원에서 지어졌다. 그렇지만 조금도 과장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문헌의 고증된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런 자세야 말로 선현들에 대한 존경의 작은 보답일 수 있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불변의 당위이다.
일대기를 쓴다는 것은 어렵다. 한 문장으로 쓴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글은 그런 흉내를 낸 글일 뿐, 능력 밖이고, 이해의 편의상 몇 항으로 분류했다. 따라서 이 글은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비 제막>에, -당시에 쓰여 진 일대기, 즉 ‘행장行狀’ 이라는 글을 다시 한 번 일독하고 상기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종손과 문중의 요청에 미력하게나마 부응하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써서 올리고자 한다.
금계께서 그 옛 그 어느 날, 농암종택 긍구당肯構堂 마루에서『애일당구경별록』을 쓰고 작첩하는 모습을 회상하며, 삼가 추모한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 퇴계의 행장, 제문, 만사, 금양정사완호기문과 단양진폐소를 원문과 함께 아래 소개한다.
그리고 이 순간, 한 마디 더 쓰겠다. 그것은 이 원고가 쓰여 지는 동안 황재천 종손과 매일 20회 이상 전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시간이 없었고, 종손은 노종부께서 갑자기 위중하시어 안동 어느 병원에 입원하여 매일 출퇴근 간호를 하셨다. 밤에 글을 쓰며 문의 했고, 종손은 막힘없이 자료를 보내 주셨고, 항상 너그럽게 말씀하셨다. 추진위원회의 많은 일도 세밀하게 뒷받침 하고 계셨다. 나는 종손께서 그런 학식이 있는 줄 몰랐는데, 차츰 의견을 교환해보니 훌륭한 인품을 지니셨고, 금계에 관해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었다. 영주시사에 빠진 영주지역 이야기를 담은 책인 『가담옥설』을 주집필하심도 이런 뛰어난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말씀은 “나는 이번 행사에 어느 위치에 있어도 상관없으며, 오직 행사만 잘 진행되면 아무래도 된다” 하셨다. 금계종손다운 말씀이라 생각되어 아울러 부기해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