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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회 작성일 26-08-0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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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요약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AD 25~57년)로, 자는 문숙(文叔).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광무(光武). 전한(前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며, 본명은 유수(劉秀). 구휼정책을 펴고,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였으며, 후한의 특색인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꽃을 피우는 등의 업적을 남김

외국어 표기

光武帝(한자)

출생 - 사망

BC 6년 ~ AD 57년

유수(劉秀)는 남양(南陽) 채양(蔡陽) 출신이다. 1세기 초에 전한을 물리치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과의 곤양대첩(昆陽大捷)의 승리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신나라 말기 농민들의 대봉기가 일어나자, 형 유인(劉縯)과 함께 녹림군(綠林軍)에 가담하여, 약 3,000여 명의 적은 군사로 왕망의 43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왕망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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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의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에 의해 형인 유인이 처형되자, 유현에게 복종하는 체하며 그의 신임을 얻고, 이후 군대를 얻어 하북지역에 정착하였다. 이 지역에서 100만여 농민의 봉기군을 편성하는 등 세력을 확장한 후, 25년 6월 나라를 세워 국호를 한(漢)이라 정하고 낙양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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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망 이래의 유적(流賊)인 적미군(赤眉軍)을 진압하는 등, 각지에 할거하던 세력을 평정하여 36년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노비를 해방시키고 죄인을 석방하여 양민이 되게 하였으며, 조세 및 부역의 부담을 덜어주고,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관리의 수를 줄이고 중앙의 상서(尙書)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도위(都尉)를 폐지하여 지방의 군대를 장악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를 강조함으로써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꽃을 피웠다. 57년 2월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병사하였으며,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광무제(光武帝)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무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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