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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신군 황헐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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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6-08-25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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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춘신군 황헐 묘비명(春申君黃歇墓誌銘)입니다. 비문의 한문 원문과 이에 대한 국역(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

春申君黃歇墓誌銘

歇公黃國遺民之后, 漸洙泗問氣度雄遠. 爲宗族復興, 委身仕楚, 授左徒. 時秦搆韓魏, 舉兵伐楚, 社稷危殆, 公冒死上書秦王, 謀得罷戰, 遂伴楚太子完質于秦. 後計使其逃歸嗣位, 是爲烈王. 元年拜令尹, 封春申君, 賜淮北十二縣. 家居吾地十五春. 公爲相廿五載, 門天下珠履三千. 是戰國四君子之一. 曾救趙, 攻秦, 兼幷鄒魯, 疏波申江. 政績卓著. 公元前二三八年楚廷內亂, 公不幸罹難. 后世修衣冠冢于故國. 經年久遠, 冢已塌陷. 今由故地同宗修復, 屬意歲歲憑吊先賢.

銘曰 : 黃族中興, 首功在歇. 銘德喩后, 繼往開來.

潢川黃氏宗親聯誼會 公元一九九六年四月

[한글 번역]

춘신군 황헐 묘비명

헐(歇) 공은 황국(黃國) 유민의 후손으로, 수수(洙泗) 지역에서 학문과 견문을 넓히며 기개가 원대하고 기품이 높았다. 종족의 부흥을 위해 몸을 바쳐 초나라에서 벼슬길에 올라 좌도(左徒)에 임명되었다.

당시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침공하여 사직이 매우 위태로웠는데, 공은 목숨을 걸고 진왕에게 글을 올리고 모책을 내어 전쟁을 멈추게 하였다. 마침내 초나라 태자 완(完)을 동행하여 진나라에 인질로 갔다. 이후 계책을 내어 태자가 탈출하여 귀국해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에 공은 영윤(令尹, 초나라의 재상)에 임명되고 춘신군(春申君)에 봉해졌으며, 회북의 12개 현을 하사받았다. 공이 우리 땅(가장)에 거주한 지 15년이 되었다. 공이 재상으로 있었던 25년 동안 문하에는 구슬 신발을 신은 식객만 3,000명에 달했으니, 이분이 바로 전국시대 사군자(戰國四君子) 중 한 분이다. 일찍이 조나라를 구하고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추나라와 노나라를 병합하였고, 신강(申江, 상하이의 상포강)의 물길을 터서 치수 사업을 이끌었다. 정치적 업적이 매우 탁월하였다.

기원전 238년, 초나라 조정의 내란으로 공은 안타깝게도 화를 입고 목숨을 잃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 고국에 의관총(衣冠塚, 시신 없이 옷과 관만 묻은 무덤)을 조성하였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묘가 무너지고 파손되었다. 이에 지금 고향 땅의 동종(同宗) 친족들이 이를 복원하여, 해마다 선현을 추모하고 기리려는 뜻을 모았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황씨 가문의 중흥은 그 으뜸가는 공이 황헐에 있도다.

그의 덕을 새겨 후세에 알리니, 옛것을 이어받아 미래를 열어가리라.

황천 황씨 종친연의회 (潢川黃氏宗親聯誼會)

서기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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