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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백학서원 설립..... 신녕현감 금계 황준량 (15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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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6-08-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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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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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건립년대 및 연혁 : 1555년(명종 10년)
  • 1555년(명종 10년) 신녕현감 황준량이 백학산 아래 양강소(현재의 대천리) 위에 건립함.
  •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12년(광해군 4년)에 중건함.
  • 1658년(효종 9년) 위치가 지형적으로 치우치고 절벽위여서 현재의 위치로 옮김.
  • 1678년(숙종 4년) 서당이 서원으로 됨.
  • 1921. 4. 1. 백학학원(지곡초등학교 및 산동중학교 전신)의 校舍로 사용
설립유래

1555년(명종 10년)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유림과 더불어 서당을 백학산 아래 양강소(현재의 대천리) 위에 건립하였으며, 퇴계 이황 선생에게 서당의 상세한 절목과 품제를 요청함으로서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하였으며, 여러번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화남면 안천리에 자리하게 되었으며, 원래는 몇 채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본당만 남아 있으며, 일제치하의 민족정신을 일깨운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의 요체가 됨으로서 근대 교육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교육장소가 되기도 함.

백학학원

일제시대 우리 지역(영천)에 있어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921년 대창면 직천리의 직천학원, 1921년 화남면 안천리의 백학학원, 1939년 은해사 백련암에 조계종 5개 본산이 힘을 합친 오산불교학교(능인中ㆍ高로 계승)가 고작이다. 오산불교학교의 경우는 도첩(승려신분증)을 가진 자에 한하여 입학을 허용한 관계로 당시 영천지역의 일반인이 교육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이로 인하여 민족적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과 항일 독립투사 백농 조재만 등이 배출되어 일제하의 민족교육의 요람지 역할을 담당함.

귀애정

위치
  •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644번지
구성내역 : 귀애정(1동), 사당(1동)
  • 귀애정(정면 4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 사 당(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보호구역지역 현황
  • 귀호리 644번지 등 5필 1,189㎡(360평)
건립년대
  • 1916년경
건축유래
  • 조선후기 학자이며 공조참의를 지낸 귀애 조극승(1803 ~ 1877)을 추앙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건립위치는 조극승 생가 옆이며, 원래 이 자리는 귀애선생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조그만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건물내역

귀애정은 우목산 아래 귀애고택의 옆자리에 건립되어 있으며, 정자 앞에는 방형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는 둥근 섬을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육각정자르르 섬 내에 두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통행토록 하였으나 현재는 되괴되어 존재치 않고 있으며, 귀애정 앞에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길이 1m, 높이 50 ~ 60㎠ 정도의 돌거북이 있었는데 이 또한 도난당하고 말았다 한다.

연못은 3면이 담장없이 터져 있는데, 일반적인 영남의 별서정원의 수법은 주위에 담장을 둘러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나 여기는 오히려 개방적으로 처리하여 호남 원림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1900년대 초반부터는 장식성이 강한 조선말의 건축양식에서 장식이 배제되고 간결한 구조를 선호하게 되는데 귀애정은 간결한 당시 풍조를 따르면서도 첨차와 보아지 등에서 조선말의 장식적인 경향이 일부 남아있어 시대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귀애 조극승

본관이 창녕이고 자는 경휴로 1803년(순조 3년) 지금의 화남면 귀호리에서 태어났다.

창녕조씨의 영천지역 입향 및 世居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태조 때 조신충이 처음으로 지금의 금호읍 창수리에 정착하였으며 영조 때 조용석이 화남면 귀호리에 이주하여 世居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극승은 父 경섭과 母 달성 서씨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28세인 183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845년에 성균관전적을 1849년 사간원 정언 및 문신선전관을 겸직하였다. 그 후 철종대에 고향에 은거하면서 유풍을 진작하였다. 그 공로로 공조참의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1877년 그가 돌아가자 그를 추앙하기 위하여 동생 성제 규승 등이 주동하여 귀애정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지금도 조씨문중과 지역민은 이들 형제의 학덕과 사상을 흠모하고 또 계승 발전 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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